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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사망>< 과거!!!

category 카테고리 없음 2021. 11. 23. 10:05

 

결국 전두환 사망

 

전 대통령 전두환 사망‥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 되었고 결국 에는 전두환 사망 한것으로 알려 졌습니다.

그동안 사과 한마디 없었고 떳떳하게 살았던 전두환씨 90세까지 잘먹고 잘싸고 잘 살다 갔네요

그 자손들도 떵떵 거리면서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정의로운것일까요?

 

전두환 과거

긴 세월 욕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인생을 한번 되돌아 보겠습니다.

 

전두환 사망 이전에 고인이 된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 훼손

 

 

혐의로 항소심 재판을 받고자 광주지방법원에 출석한 그는

 

광주시민과 유가족에게 사과할 마음이 없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묵묵부답 했고, 재판 도중에는 건강 이상 증세를

 

보여 피고인, 호흡이 곤란합니까?라는 질문까지 들은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인 이순자씨가 식사도 못 했고

 

가슴이 답답 하신 것 같습니다.라고 대신 대답 했다고 합니다.

 

 

조비오 신부가 목격한 헬기 기총소사와 관련해 전두환은 헬기에서

 

빗자루로 소제하듯이 시민들을 향해 사격하는 일이 가능하겠냐며

 

터무니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두환 회고록> 제1권은 헬리콥터의 기총소사에 의한 총격으로 부상한

 

사람들을 목격 했다는 진술도 헬리콥터가 장착한 화기의

 

성능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한

 

뒤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일 뿐이라며

 

조비오 신부를 비난했어요.

 

 

하지만 그의 강변과 관계없이 이 사회는 헬기 기총소사를

 

사실로 인정해 가고 있습니다.

 

2017년에 구성된 국방부 5·18 특별조사위원회는 광주 전일빌딩에서

 

기총소사의 탄흔을 찾아냈고, 지금 진행 중인

 

사건의 1심 재판부 역시 이를 사실로

 

인정 하고 징역 8개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했어요.

 

 

2019년 1월 7일 광주지법 재판을 앞에 두고 1월

 

1일 자 대담 인터뷰에서 이순자씨는 정말 하늘이

 

원망스럽고 그렇습니다.라며 왜 저분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라며 억울함을 호소했어요.

 

그는 민주주의의 아버지가 누구예요?라고 한 뒤 곧바로

 

나는 우리 남편이라고 생각해요라고 힘주어 말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원인으로 직선제 개헌을 해준 것과 더불어

 

단임제 개헌을 한 것을 들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거는 우리나라에 처음로 단임을 이룬

 

것, 그 덕분에 지금 대통령들이 5년만

 

되면 착착, 더 있으려고 생각을 못하잖아요라고 주장 했어요.

 

이승만은 12년, 박정희는 18년간 장기 집권했지만, 남편이

 

단임제 개헌을 해놓은 뒤로는 다들 5년만

 

하고 착착 자동적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궤변이지만, 전두환을 한국 민주주의와 연관시킨 그의

 

말에는 음미해볼 구석이 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 성장 속에 전두환의 인생이 위치해 있기 때문 입니다.

 

민주화운동이 가장 격렬한 시기에 대통령을 지내다가 시민혁명을 맞이하더니

 

노년기를 세상의 욕을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많이 극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전두환은 1961년부터 1988년까지 27년간 정치군인과 대통령으로서 큰소리치며 살다가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세상의 비판과 단죄를 받는 데 보내고 있습니다.

 

 

 

전두환은 하나회 리더

전두환은 박정희의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의 리더로서, 또 국민을

 

감시하는 국군보안사령관으로서 박 정권을 떠받치는 군부 엘리트 역할을 수행했어요.

 

1961년 5·16 쿠데타 직후부터 박정희의 신임을 받으며 승승장구한

 

30세 이후의 전두환은 의욕과 자신감이 넘치는 청년 군인이었습니다.

 

박 정권이 민주주의를 억압 하고 3선 개헌을 관철하던 시절에 그는 활발한 30대를 보냈습니다.

 

 

 

그가 40대로 접어든 1970년대에는 보수세력이 유신체제라는 미증유의

 

독재 시스템을 구축 했고, 이에 따라 민주세력은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로 위축됐습니다.

 

이런 유신시대에 전두환은 군인으로서 절정을 누렸습니다.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시행된 1972년 12월 27일로부터 닷새 뒤인

 

1973년 1월 1일 그는 임기제 준장으로 승진했어요.

 

유신체제가 떠오르자 그의 어깨에 별이 달리게 된 것입니다.

 

 

 

 

권력의 정점 이후

그러던 그는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온 1988년 이후로 다른 인생을 살게 됐습니다.

 

국회에서는 광주 청문회와 5공 청문회가 열렸고, 퇴임 뒤에

 

상왕으로 오르고자 했던 그는 그해 11월 23일

 

설악산 백담사로 올라갔습니다.

 

3당 합당으로 보수진영의 국회 지배력이 강화한 뒤인

 

1990년 12월 30일 백담사에서 내려왔지만, 세상은 아직까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5·18 진상을 규명 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한

 

국민의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졌고,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권은 이런 흐름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에는 1995년 12월 3일 고향이었던 경남 합천에서

 

잠옷 바람으로 체포돼 안양교도소로 끌려가고 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5·18에서 12·3으로 이어지는 이 같은 과정은 전두환 개인에

 

대한 응징의 과정이라기보다는 반민주세력에 대한 민주세력의 승리의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5·18 직후에는 전두환 집단이 광주시민들을 법정에 세우고 처벌했어요.

 

그랬던 것이 15년 뒤에는 광주시민과 국민들이 전두환과 그

 

일당을 법정에 세우는 양상으로 뒤바뀌었습니다.

 

 

전두환이 주재자가 되는 5·18 법정은 부정되고 전두환이 피고가

 

되는 5·18 법정이 열렸습니다.

 

이런 역전이 가능했던 것은 민주주의가 그만큼 성장했기 때문 입니다.

 

 

 

5·18 직후에 광주시민들을 재판한 과오에 대하여 참회의 마음을

 

표한 김이수 전 헌법재판관은 올해 4월 <법학평론>

 

제11권에 5·18광주항쟁과 5·18의 두 법정이라는 논문을 기고했어요.

 

그는 이 논문에서 피고가 각각 다른 5·18

 

법정이 시차에 대하여 열리는 과정을 두고

 

5·18의 첫 번째 법정에서 두 번째

 

법정으로 가는 과정은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평가했어요.

 

1988년 이후로 국민들은 전두환을 감옥에 넣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백담사로 도피하는 전두환을 붙들 수 없었습니다.

 

이는 국민들이 6월항쟁이라는 성과를 거두고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 입니다.

 

전두환을 지켜줘야 함은 물론이고 그 자신도 같이 지켜야

 

하는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랬던 것이, 국민들이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5·18 특별법

 

및 헌정질서 파괴범죄 공소시효법의 제정까지 추동하면서

 

전두환을 법정에 세우는 상황으로 변모했어요.

왜 나만 갖고 그래?

 

이게 가능했던 것은 국민들이 끊임없이 민주화 투쟁을 했기 때문 입니다.

 

전두환도 미처 예견하지 못했을 공소시효 연장이라는 마술을 국민들이 펼친 것입니다.

 

안양교도소에 수감되고 법정에 선 그는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국민들이 전두환만 갖고 그런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감옥에 가지 않으려고 산으로 올라가고

 

고향으로 내려가서는 등의 잔꾀를 많이 부린

 

점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두환이 수감되고 유죄 판결을 받는 1995년 하반기부터

 

1997년 중반까지는 보수진영이 분열을 일으켜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을 만들고 민주진영과 김대중이 자민련을 끌어들여

 

1997년 12월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향해 나아가는

 

시기와 대체로 일치합니다.

 

하지만 구세력인 김종필과 연대해야 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1997년의 대선 승리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고, 세상의 무게는 아직까지 구세력

 

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이런 구도는 1997년 대선 직후에 전두환이 사면을

 

받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전두환을 확실히 처벌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이

 

축적되지 않았기에 그를 도로 풀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불안정한 구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일보시킨 것이 2016년 촛불혁명입니다.

 

보수 진영은 훨씬 더 약해졌고 민주세력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이런 변화는 전두환이 또다시 법정으로 불려나오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자명예 훼손 혐의라는, 이전보다 훨씬 가벼운 혐의로도

 

그가 광주까지 재판 받으러 가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민주주의의 힘이 그만큼 강력해진 것입니다.

 

 

 

하지만 전두환은 아직까지 참회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성격적 특질에도 어느 정도 연유하지만, 그를 지탱해주는

 

정치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촛불혁명의 충격을 받고도 보수세력은 아직까지 힘을 보유 하고 있습니다.

 

공정성을 화두로 도리어 뻔뻔하게 호통을 치기까지 합니다.

 

이 화면은 전두환의 뻔뻔함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세력이 아직 완전히 힘을 잃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민주주의를 향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화면입니다.

 

 

 

전두환은 이전보다 약해진 모습으로 법정에 출석했어요.

 

그가 아무리 뻔뻔 하고 허세를 부릴지라도 역사는

 

진보를 향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갈수록 고립되고 약해지는 전두환의 모습은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앞을 향해 진보하는 시대적 대세를

 

어쩌지 못하는 한국 보수의 현실을 떠올리게 할 만합니다.

전두환 아들은 신학원에

참고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차남으로 알려진 전재용(나이는 57세) 씨가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신학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답니다.


전씨는 2021년 3월 5일 아내 박상아 씨와 함께 극동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뒤에 이같은 사실을 밝혔던 것입니다. 전씨는 교도소 복역 중 신학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답니다.

전두환 사망 소식을 들은 하늘에 있는 광주 시민들 지옥문 앞에서 기다리겠네요
#전두환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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